• 최종편집 2024-04-19(금)
 
광주·전북·강원·세종교육청, 2년6개월 만에 역사교과서 보조교재 공개
박근혜 정부 역서교과서 국정화에 맞서 힘 모아, 올해 2학기부터 활용

정권의 ‘역사’에 맞섰던 시민의 ‘역사’가 2년6개월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광주·전북·강원·세종교육청이 20일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 보조교재를 공개했다. 4개 교육청은 2016년 3월 ‘역사교과서 보조교재 공동개발 및 사용승인 협약’을 맺고 박근혜 정부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대응하기 위해 교재를 만들어 왔다. 이날 공개된 역사교과서 보조교재는 ‘대응’할 대상은 사라졌지만 촛불 혁명으로 달라진 교육 환경에서 더욱 활발히 학생들을 만날 예정이다.
 
광주시교육청은 처음 역사교과서 보조교재를 공개한 시교육청 기자실에서 간단한 설명을 통해 “교재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2종으로 민주‧인권‧평화의 광주정신을 계승한 주제와 광주의 지역사를 중심으로 구성했다”며 “중‧고등학교 역사를 배우는 모든 학생들에게 보급해 올해 2학기부터 본격적으로 수업에 활용할 예정이다”고 밝혔다.
 
시교육청은 여름방학인 8월에 중‧고등학교 역사교사를 대상으로 보조교재 활용연수를 실시해 학교 현장에서 활용성을 높이는 방안을 모색하는 한편, 교재에서 개선할 점은 없는지 현장의견을 폭넓게 수용할 방침이다.
 
공개된 교재는 이날 전국적으로 ‘기존 역사교과서가 가진 한계를 보완하고 대안을 제시했다’는 평을 받았다. 새로운 교재가 가진 기존 역사교과서와의 차별성 때문이다.
 
대표적인 부분이 지역사 서술이다. 새 교재엔 각 ‘지역의 역사’가 20% 가량 포함돼 있다. 광주시교육청 역사교재엔 광주의 역사가, 전북교육청 교재엔 전북의 역사가 실려 있다. 기존 대다수 역사교과서가 수도 위주인 중앙의 역사로 서술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각 학생들이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지명과 지형, 인물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는 것은 분명 흔치 않은 기회다.
 
예를 들어 광주시교육청 역사교재를 통해선 호남에서 진행된 임진왜란과 일제의 이른바 ‘남한 폭도 대토벌 작전’을 배울 수 있다. ‘남한 폭도 대토벌 작전’이 실제로는 호남의병을 섬멸하려는 작전이었음을 교과서에서 처음 만날 수 있다. 학생들 집 근처 산에 남아 있는 항일 의병들의 토굴을 사진으로 만날 수 있고 3·1운동 때 태극기를 흔들다 일본 헌병의 칼에 왼팔이 잘린 수피아여학교 윤형숙 선배의 얼굴도 볼 수 있다. ‘일제의 침략’이 손 안의 송곳처럼 학생들에게 현실로 다가가는 대목이다.
 
특히 근현대사에서 이런 현실적인 묘사가 많다. 중학교 교재 264쪽에선 ‘감히’ 일본 제국에 반항하며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주도한 성진회 학생들의 선명한 얼굴과 눈빛들을 만날 수 있고 고등학교 교재 380쪽에선 4·19 혁명 때 교문을 돌파하던 광주고등학교 학생들의 굳건한 표정을 만날 수 있다. 상세히 설명된 5·18 민주화 운동과 6월 항쟁 때 20만 시민이 모여 금남로에서 열었던 ‘이한열 노제’를 볼 수 있다. 젊었던 이한열의 모교가 광주진흥고등학교였다는 사실과 그가 광주 북구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잠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016년 당시 보조교재 개발을 담당했던 광주시교육청 박민아 교육연구사는 “여성, 어린이, 학생, 서민, 노동자, 농민 등 사회적 약자의 관점에서 역사, 특히 현대사를 바라보려 했다”며 “교과서 전반에 인권과 평화가 녹아있지만 교과서가 가져야 하는 균형감도 잊지 않았다”고 말했다.
 
박 연구사는 개발 초기 상황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박 연구사는 “당시 17개 시·도교육청에서 4개 교육청만 만들었지만 우리가 앞서서 만들고 원하는 교육청이 있으면 제공하려고 했다”며 “만들 때 너무나도 엄중한 현실이 있었고 또한 4개 시·도가 하다보니까 집필진들이 지역을 돌아다니며 만들어야 했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참여한 선생님들은 신분상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고 정보기관에서도 수시로 집필진들의 워크숍 일정을 물어와 자료 노출에 조심을 했다”고 덧붙였다. 박 연구사는 “특히 기념사진을 찍을 때, ‘독립지사들이 사진을 찍을 때 이런 마음이었을까? 이 사진을 찍으면 (나중에 기록으로 남아) 불편할 수도 있지만 보람은 있을 거야’라며 서로 다독였다”고 밝혔다.
 
또한 “당시 장휘국 교육감이 아무리 바빠도 워크숍을 찾아 격려를 했다”며 “우리는 지역 시민들과 교육감님, 시의회 등이 지지해줘서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는데 다른 교육청은 예산 통과가 늦어지는 등 더욱 힘들었다고 들었다”며 “집필진들이 학교에서 수업과 행정업무를 다하고 책을 쓰고 모여 의논을 하는 등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말했다.
 
다양한 어려움 속에서 만들어졌지만 결과물은 훌륭하다. 광주시교육청 중학교 역사교재의 경우 ‘도로명에 얽힌 광주의 인물 이야기’라는 비밀병기(킬링 콘텐츠)를 갖고 있다. 우리가 매일 걷거나 차를 타고 이동하는 ‘길’에 인물들의 이름(호)이 붙어있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지역의 땅과 길이 모두 ‘이야기’로 바뀐다. 학생들이 생활 속에서 역사를 떠올리게 된다.
 
박 연구사는 학생들에게 “(교재를) 잘 활용했으면 좋겠다. 올해만 보급하지 않고 모든 아이들이 광주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치면 우리 지역에 대한 정체성과 정신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즉 광주 정신이 학생들의 마음속에 남아있게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이번 역사교과서 보조교재엔 ‘교재의 탄생’에 대한 설명도 포함돼 있다. 논쟁이 있는 부분에서 독자(학생)들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가 하면 세계사적 시각에서 대한민국 역사를 바라보기도 한다. 양세봉과 김원봉을 만나고, 권기옥과 강주룡을 만난다. 미쓰비시에 강제 동원된 여성 노동자들을 만나며 학도보급대로 동원된 학생들과 징용자들의 노동 현장을 만나게 된다. 마지막엔 세월호와 촛불 시민들의 모습까지, 역사교재의 기록은 현대사 앞에서 ‘인쇄’ 전까지 눈감지 않았다.
 
지역사 집필과 전체 검수를 담당했던 광주일고 신봉수 교사는 “국가주의적인 획일적 내용을 담지 않고 다양한 시각에서 역사를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 해서 학생들이 보기엔 내용들이 생소할 수 있다”며 “‘아! 이런 시각에서도 역사를 볼 수 있구나‘ 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신 교사는 “또 하나는 지금까지 역사가 항상 중앙 중심이었으나 이 책이 처음으로 지역사를 넣었다”며 “(지역사에서) 광주 지역의 민주화운동 전체를 다뤘는데 특히 4·19 역사에서 광주는 지워져 있는 상태였지만 광주는 이런 역할을 했다는 것들을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모든 지역에 역사가 있고 그곳의 사람들이 단순히 살아온 것이 아니라 ‘행동’해 왔다는 사실이 기록돼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역사교재는 그 의미를 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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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역사, 지역의 역사를 배우는 ‘교과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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